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보는 미래 형성의 원리, 그리고 매개적 사물들
(가급적 영화를 보고 보세요~ 의도치 않게 스포일러가 되는 것을 전 원치 않습니다.)
영화에 대한 반응은 호불호가 엇갈리나 보다. 대개는 난해한 구성과 복잡한 흐름이 이해를 어렵게 만들고 관객의 멘붕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이해하고 나면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워쇼스키나 티그베어의 전작으로 미루어 예술 감독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아니지 않은가. 다만 여섯 개의 옴니버스식 구성, 각기 다른 장르, 숨가쁜 교차편집, 사물로 매개된 단서에 대한 다소간의 불친절, 그리고 과거에서 미래의 500년 가까이의 과거-현재-미래의 대서사를 꿰기 위한 야심 등이 ‘숟가락으로 떠먹여 주길 바라는' 관객을 불평하게 만들었으리라. 영화를 보기 전 소설을 읽는다면 그리 어려운 영화도, 아주 상징이 많이 삽입된 고차원적인 내용은 아니다. 그렇다고 소설이 영화보다 친절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복잡한 소설의 구성을 영화가 설명해 주며, 영화는 소설에 꽤나 충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과 영화를 함께 본다면 이 감독들이 너무나 친절한 사람들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관객의 지루한 느낌은, 소설에서는 ‘윤회'라는 주제가 직접적으로 표현되기 보다는 독자의 해석에 맡겨지는 반면에, 영화에서는 ‘같은’ 배우가 다른 삶을 연기함으로써 윤회의 의미를 좁게 만들어 버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반면 만약 소설처럼 각 6편이 다른 배우가 연기를 했더라면 영화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6편을 따로 만드는 게 낫았을 테니 말이다. 여튼, 그렇게 6개의 이야기를 엮는 것이 설득력있는 개연성을 줬는지는 모르겠고 다소 그 논리성이 떨어져 보인다. 서사보다는 그 6개의 스토리를 짜맞추면서 197분을 소비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긴 하다.
(가급적 영화를 보고 보세요~ 의도치 않게 스포일러가 되는 것을 전 원치 않습니다.)
영화에 대한 반응은 호불호가 엇갈리나 보다. 대개는 난해한 구성과 복잡한 흐름이 이해를 어렵게 만들고 관객의 멘붕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이해하고 나면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워쇼스키나 티그베어의 전작으로 미루어 예술 감독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아니지 않은가. 다만 여섯 개의 옴니버스식 구성, 각기 다른 장르, 숨가쁜 교차편집, 사물로 매개된 단서에 대한 다소간의 불친절, 그리고 과거에서 미래의 500년 가까이의 과거-현재-미래의 대서사를 꿰기 위한 야심 등이 ‘숟가락으로 떠먹여 주길 바라는' 관객을 불평하게 만들었으리라. 영화를 보기 전 소설을 읽는다면 그리 어려운 영화도, 아주 상징이 많이 삽입된 고차원적인 내용은 아니다. 그렇다고 소설이 영화보다 친절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복잡한 소설의 구성을 영화가 설명해 주며, 영화는 소설에 꽤나 충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과 영화를 함께 본다면 이 감독들이 너무나 친절한 사람들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관객의 지루한 느낌은, 소설에서는 ‘윤회'라는 주제가 직접적으로 표현되기 보다는 독자의 해석에 맡겨지는 반면에, 영화에서는 ‘같은’ 배우가 다른 삶을 연기함으로써 윤회의 의미를 좁게 만들어 버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반면 만약 소설처럼 각 6편이 다른 배우가 연기를 했더라면 영화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6편을 따로 만드는 게 낫았을 테니 말이다. 여튼, 그렇게 6개의 이야기를 엮는 것이 설득력있는 개연성을 줬는지는 모르겠고 다소 그 논리성이 떨어져 보인다. 서사보다는 그 6개의 스토리를 짜맞추면서 197분을 소비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긴 하다.
나는 영화에 대한 평이나 분석보다는 요즘 내가 가지고 있는 ‘미래의 형성 원리’라는 관심사에 더 촛점을 맞춰 영화를 봤다. 내 궁금점은 과연 미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이고, 영화가 엉뚱한 영감을 준 것으로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신이 났다. 어떤 원리에 의해 미래가 만들어질까라는 질문에 소설과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윤회와 사물이라는 흥미로운 대답을 해줬고, 동양인에게 윤회는 사실 너무나 익숙해서 잠시 잊고 있었던 과학적이지 않게 치부되는 원리라 미처 생각지 못한 단서였다. 또한 그 가운데에 사물이라는 것이 그 주된 단서가 되어 소설과 영화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도 디자인을 전공하는 나에게는 인상깊은 일이었다.
영화는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자궁에서 무덤까지 우리는 다른 이에게 의존한다. 과거, 현재, 그리고 우리가 죄를 범하고 선을 행할 때마다 새로운 미래가 태어난다.”고 말한다. 영화의 주제다.
어쩌면 기가 막힌 미래 형성의 원리가 아닐까. 불교에서 다루는 6도윤회(六道輪迴)의 ‘6’이라는 숫자가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6편의 이야기, 6중주의 6이라는 숫자가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 실제로 각 주인공들은 그 시대의 불합리와 의심을 품거나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데, 애덤 어윙이 1850년대에 그려지는 노예제도에 맞서 틸다(배두나 분, 영화에서는 손미~451의 환생이라는 강력한 암시로 보여지는)와 함께 지배체계에 저항하는 모습, 프로비셔가 성적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맞서 죽음으로 저항하는 ‘용기', 루이자 레이가 거대 기업에 죽음을 감내하면서 맞서는 고발정신, 캐번디시의 (고령화 사회의 무기력한 노인들의) 감금장치인 요양원에서의 탈출로서, 손미~451의 ‘상승ascend’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상승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지적 능력을 억제한 패브리컨트가 순혈인간화하는 극복을 말한다. 따라서 이 상승은 불교에서 말하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열반의 상태, 증득이 되는 것이다. 비로소 여섯 번째 이야기에서 손미는 스스로 부처가 된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게 된다. 그리고 다시 자크리로 환생하여 ‘모든 일이 지난 후' 다시 6도윤회의 세계로 돌아온 셈이다.
다시 말해서 6개의 에피소드는 그 시대의 저항을 담고 있다. 소설 속에서 ‘어윙, 인종 간의 우정은 절대 충성스러운 사냥개와 주인 사이의 애정을 뛰어넘을 수 없소’라는 헨리 구스 의사의 충고나,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약한 자는 고기가 도고 강한 자는 먹는다’라거나, 영화의 마지막 ‘세상에는 자연적인 서열이 있고 그 서열에 저항하는 자의 최후는 좋지 않다. 이 운동은 성공하지 못해. 네가 그들과 함께하면 모든 사람들이 네 가족 모두를 기피할 거야. 최악의 경우 맞아 죽던가 십자가에 못박힐 것이다.’라는 어윙의 장인의 말에 그들은 저항한다.
그 저항의 끝에 손미~451이 있으며 그래서 ‘손미~451’의 배두나 역이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모든 주인공의 삶의 종착지가 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미래에 점차 패브리컨트의 복제 인간의 운명을 띌 것이라는 암시, 혹은 패브리컨트의 깨달음을 통해서만 진정한 ‘상승'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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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배경과 주요 인물 < 영화를 이해하는 데 이 흐름은 필수적이다..
<애덤 어윙의 태평양 일지>, 1849년(1950년), 태평양의 어느 섬
애덤 어윙(짐 스터개스), 헨리 구스 의사, 선장, 틸다(배두나)
<제델헴에서 온 편지>, 1931년, 벨기에, 1936년 캠브리지
로버트 프로비셔(벤 위쇼), 식스스미스 박사, 비비안 에어스, 조커스타(할 베리)
<루이자 레이 미스터리>, 1970년, 샌프란시스코, 1973년
루이자 레이(할 베리), 루퍼스 식스스미스, 멕시칸 여자(배두나)
<티머시 캐번디시의 치 떨리는 시련>, 21세기 초반, 영국, 2012년
캐번디시(휴 그랜트), 간호사 녹스, 캐번디시의 형수(벤 위쇼),
<손미~451의 오리즌>, Near Futrue, 한국 2144년
손미~451(배두나), 장 혜주(짐 스터게스), 의사
<슬로샤 나루터와 모든 일이 지나간 후>, Far Future, 2321년, 장소불명 어느 섬 (하와이)
자크리(톰 행크스), 메로님(할 베리), 올드 조지, 대수녀님, 코나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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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 전생과 후생을 엮는 열쇠가 각 이야기의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혜성 모양의 표식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물이다. 소설에서는 이야기를 연결하는 직접적인 매개가 되는데, 애덤 어윙의 일지는 프로비셔가 읽게 되고, 프로비셔는 자신의 연인 식스스미스에게 이 이야기를 편지로 보낸다. 이어서 식스스미스의 죽음과 함께 편지는 루이자 레이의 손에 들어가고, (한번 더 루이자 레이는 프로비셔의 <클라우드 아틀라스 6중주>를 우연히 듣게 된다) 루이자 레이의 이야기는 소설화되어 기차에서 캐번디시에게 읽히게 되고, 프로비셔가 살았던 그 저택은 2012년 요양원이 되어 캐번디시가 시련이 시작된다. 그 캐번디시의 시련은 다시 영화가 되어 손미~451이 이전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 된다. 또한 손미~451이 남긴 예언과 계시는 먼 미래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지가 된다. 다시 한번 영화의 메시지로 돌아가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과 악이 미래를 구성하며 우리가 만들고 남기는 모든 사물이 바로 미래 세계를 형성한다고 바꿔 표현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것이 어찌 중요하지 않다 할 수 있을까!)
다시 정리하면, 일기 > 편지, 음악 > 소설 원고 > 영화 > 계시 이런 매개다.
또한 영화에는 매개가 되는 사물을 찾아 보는 재미를 주는데, 1949년 어윙이 지니고 있던 파란 단추는 먼 미래의 자크리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크리의 목숨을 구하는 결정적인 사물이 된다. (우리 주위의 수많은 넘치는 사물들 중 이런 사물은 무엇일까?)
파란색 단추가 500여년 후 자크리의 생명을 구한다.
영화의 교차편집이 관객에게는 이해를 어렵게 한다는 불평이 있지만, 사실 그 교차편집은 매우 친절한 장치다. 소설은 다소 독특한 구성 A-B-C-D-E-F-E’-D’-C’-B’-A’ 로 이어지는, 즉 한 편의 이야기의 전반부를 다루고 역순으로 그 후반부가 놓여지는 구성이다. 이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나아갔다가 미래에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구성으로 이를 통해 작가는 소설의 윤회적 구성을 보여주려 한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명쾌한 반면에 영화에서 보여주는 ‘데자뷰' 같은 효과를 흐름 속에서만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소설은 그것을 완전히 뜯어서 보지 않는 한 이야기로 읽히며, 따라서 소설이 영화보다 더 몰입도가 높다. 반면에 영화는 여섯 편의 이야기의 시점을 비교해 볼 수 있도록 차곡차곡 보여주고 있어 더 이해하기 쉽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애덤 어윙과 틸다, 프로비셔와 식스스미스, 루이자 레이와 꼬마의 우정, 캐번디시와 첫사랑, 손미~451와 장혜주, 자크리와 메로님의 연인 관계를 설명해주는 장면은 얼마나 친절한가 말이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는 노예봉건사회 > 자본주의사회에서 더 심화된 기업관료주의 사회, 그리고 모든 것이 대멸망 이후의 원시공산사회로 돌아가는 흐름을 보인다. 손미~451이 나오는 시대에서 '시민'은 '소비자'로 묘사되는데 이것이 기업이 곧 국가인 기업관료주의 사회를 말해준다. 반면 마르크스의 역사발전론은 원시공산사회, 노예사회, 봉건사회, 자본주의 사회를 지나 새로운 사회로 이행된다고 설명한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새로운 사회는 여전히 과정이고 희망으로 표현된다. 손미~451은 그러나 누군가는 이미 그 진실을 믿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이미 시작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기록관리자 박에게 전해져 먼 미래, 인류를 구하는 계시가 된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는 노예봉건사회 > 자본주의사회에서 더 심화된 기업관료주의 사회, 그리고 모든 것이 대멸망 이후의 원시공산사회로 돌아가는 흐름을 보인다. 손미~451이 나오는 시대에서 '시민'은 '소비자'로 묘사되는데 이것이 기업이 곧 국가인 기업관료주의 사회를 말해준다. 반면 마르크스의 역사발전론은 원시공산사회, 노예사회, 봉건사회, 자본주의 사회를 지나 새로운 사회로 이행된다고 설명한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새로운 사회는 여전히 과정이고 희망으로 표현된다. 손미~451은 그러나 누군가는 이미 그 진실을 믿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이미 시작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기록관리자 박에게 전해져 먼 미래, 인류를 구하는 계시가 된다.
손미~451의 계시 - 기록관리자 박에 의에 의한 기록
소설의 표현을 빌어 마치고자 한다. ‘실제 과거는 깨지기 쉽고 항상 어슴푸레하며 + 접근 + 재구성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반면 가상의 과거는 다루기 쉽고, 항상 빛나며 + 사기로 넘기거나 밝혀내기가 훨씬 더 어렵다. … 그러나 실제의 미래는 내일이 오늘을 무색하게 하듯이, 우리의 가상 미래를 무색하게 할 것이다. 유토피아처럼 실제의 미래 + 실제의 과거는 아련히 먼 곳,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곳에만 존재한다.’
즉 과거와 미래는 똑같이 가상적이다. 그리고 똑같이 현재에 구성되는 것이며 그곳에는 우리가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욕망이 반영된 이미지일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미래를 위한 행동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원히 내려지지 않겠지만 말이다.
다음에는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미래 부분에 담긴 사물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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